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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비밀기록으로 본 마오… 그는 '스탈린의 학생'이었다

바람아님 2017. 4. 2. 09:11

(조선일보 2017.04.01 유석재 기자)


러시아 출신 판초프 저술 

창당부터 1950년대까지 소련 재정 지원받고 지시 따라

스탈린 환심 사려 6·25도 참전

"타고난 선전 선동가였으나 반인륜적인 독재자이기도"


마오쩌둥 평전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더 판초프·스티븐 레빈 지음

심규호 옮김 | 민음사 | 1044쪽 | 5만원


"당신들은 나를 모스크바로 초대해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소. 

내가 왜 여기서 그저 먹고 자고 배변하면서 지내야 한단 말이오?"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불과 두 달 뒤인 1949년 12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세계 공산주의의 심장'인 모스크바로 간 중국 국가주석 마오쩌둥

(毛澤東·1893~1976)의 항변이었다.


러시아 출신으로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캐피털대 역사학 교수인 저자 알렉산더 판초프(62)의 이 평전

(원제 'Mao: The Real Story')에 따르면, 스탈린은 첫 만찬 이후 한 달 가까이 마오를 만나지 않았다. 

일부러 굴욕감을 주면서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살해될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리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마오는 "더 이상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며 

침실 문을 걸어잠갔다. 이윽고 마오를 '만나 준' 스탈린은 중국 내 소련의 경제적 특권이 담긴 협정안을 내밀었고, 

마오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독재자였지만 '독자적으로 중국 공산당을 이끈 혁명가'라는 것만큼은 큰 의심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판초프가 2007년 러시아어로 처음 출간했으며 2012년 스티븐 레빈과 공저로 영역본을 낸 이 책은 

그 '상식'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미국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가 1936년 마오를 만난 뒤 출간한 '중국의 붉은 별'(두레)은 국민당의 추격을 피해 

장정에 성공한 '혁명 영웅'의 이미지를 각인시켰고, 1980년대 국내 학생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66년에 나온 미국 하버드대 교수 스튜어트 슈람'모택동'(두레)은 문화대혁명기의 마오를 비판하긴 했으나 

'독자적 혁명가'의 신화를 깨지는 않았다. 2005년 장룽과 존 할리데이의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까치)이 

본격적인 마오 비판에 나섰지만 근거가 약하다는 이유로 학계의 비판을 받았다.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위 사진) 두 달 만에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아래 사진은 마오(왼쪽)와 스탈린이 그해 12월 21일 회동하는 모습. 이 책의 저자 알렉산더 판초프는 당시 마오가 스탈린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하는 ‘학생’과 같았다고 말한다.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위 사진) 두 달 만에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아래 사진은 마오(왼쪽)와 스탈린이 그해 12월 21일 회동하는 모습. 

이 책의 저자 알렉산더 판초프는 당시 마오가 스탈린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하는 ‘학생’과 같았다고 말한다. /민음사


판초프는 "마오가 스탈린의 순종적인 학생이자 충실한 추종자"였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러시아 문서보관소에서 빼낸 구소련의 비밀 기록이 '무기'이다. 

마오의 정치 보고서와 편지, 소련 지도자와 회담한 속기록부터 소련 의사가 마오를 진찰한 의료 기록, 

KGB의 비밀 장부 등 방대하면서 생생한 기록이다.


입수 경위가 미심쩍고 전체가 아니라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 자료는 중국 공산당의 '흑역사'로 연결된다. 

중공은 1921년 창당부터 1950년대 초까지 계속 모스크바에 재정적으로 의지하고 있었으며, 

마오를 비롯한 중공 지도자들은 권력 투쟁에서 이기기 위해 스탈린의 환심을 사야 했다. 

마오가 6·25전쟁에 무리하게 참전한 것도 "크렘린의 수장(스탈린)에게 중화인민공화국 지도자가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려는 계산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동굴 마르크스주의자(Cave Marxist)'로 폄훼하던 스탈린에게 

잘 보이려는 술책이었지만 결국은 6·25전쟁을 '세계 혁명'으로 확산시키려던 소련 전략에 놀아난 셈이다. 

100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중국 경제가 파탄날 지경에 이르렀던 6·25전쟁에서 마오가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였다.


중문과 영문 자료를 포함한 방대한 사료와 폭넓은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쓴 이 책은 마오의 '두 얼굴'에 대해 

흡인력 있게 파고든다. '앞쪽 얼굴'은 사회를 변혁시켰으며 중국을 반(半)식민지 상태에서 해방시킨 민족 영웅의 모습이다. 

아직도 많은 중국인이 그를 추앙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뒤쪽 얼굴'은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를 강요하며 반(反)인륜적 범죄 행위를 저지른 독재자의 모습이다. 

묘하게도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인의 분노가 4인방에게 집중되면서 그는 비난의 표적으로부터 벗어났다.


흥미로운 것은 그동안 의심할 바 없는 혁명가의 시기로 여겨지던 1949년 이전의 마오에 대해서도 

이 책이 메스를 들이댄다는 사실이다. 책에 따르면 중소 지주의 아들인 젊은 마오는 농민을 어리석고 가증스럽게 여기는 

귀족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자신의 명성을 쌓는 일에 몰두하느라 임종 직전의 모친을 외면한 패륜아였다.


나아가 마오가 사상가보다는 선동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암시도 준다. 

"그는 실제 사실을 이론적으로 개괄하는 능력, 자신의 사상을 산뜻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그것을 교묘하게 

개념적인 형태로 만드는 재능, 선전 선동가로서 대단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 점에서 남들과 달랐다."(236쪽) 

고대든 현대든 영웅의 '신화'는 언젠가 벗겨지기 마련이며, 중요한 것은 그 '신화'를 덜어낸 뒤 남는 민낯일 것이다.


마오를 스탈린의 '충실한 추종자'로 묘사한 것은 소련이 중국 혁명을 좌지우지하던 20세기 전반기의 현실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소련 측의 시각이 압도적으로 주입된 이 책이 또 다른 편향을 보인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