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1.04. 23:24
강력한 野黨 없는 게 정권의 毒인 줄 알아야
나라가 '조조(早朝) 할인' 극장 같다. 1970~1980년대 변두리 극장에선 아침 이른 시간에 정식 요금의 절반만 받고 영화 두 편을 틀어줬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특감반원의 민간인 사찰 의혹 폭로가 이어지는 가운데 며칠 전부터 기획재정부 전(前) 사무관이 청와대의 민간기업 인사 개입, 4조원대 적자(赤字) 국채 발행 압력 등 의혹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조조할인 동시(同時) 상영' 영화와 달리 화질(畵質)도 선명하다. 대충대충 폭로물이 아니다. 사건 무대·등장인물·시간·대화 내용까지 명시(明示)돼 있다.
배는 바닥부터 물이 새고 권력은 꼭대기부터 먼저 샌다. 이번 폭로물의 주요 무대가 청와대이고, 핵심 등장인물이 청와대 사람들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닥에 구멍이 뚫려 가라앉은 정권은 없다. 문제는 꼭대기다. 힘과 정보와 비밀이 위로 쏠려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비서들이 유독 활개를 치는 현 정권에선 더 그럴 위험이 크다.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적자 국채 발행 압박 과정에는 청와대 비서관의 호통 전화에 허둥대는 기획재정부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젊은 사무관에겐 충격이 컸을 법하다.
훔칠 기회가 없어서 훔치지 않았다고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손에 권력을 쥐여줘 봐야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정의의 사도(使徒)처럼 행세하던 사람 가운데 열에 아홉은 아주 딴사람이 된다. 시민단체 특히 '민주'라는 모자를 쓴 단체 출신에 이 유형(類型)이 많다. 자기는 세 차례나 불법 위장 전입을 했으면서도 위장 전입 사건 재판장을 맡아 징역형을 선고했다는 어느 신임 대법관이 그런 케이스다.
청와대의 민간인 사찰 의혹을 폭로한 전 민정수석실 특감반원은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그가 검찰 간부의 비위(非違) 관련 첩보 보고서를 청와대 반(反)부패 비서관에게 올렸더니, 그 비서관이 첩보 내용을 비위 당사자에게 전화로 알려줬다고 한다. 비서관은 정보 유출(流出)이 아니라 사실을 확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나와 우리 편'이 아닌 '남과 다른 편'에게도 그런 잣대를 들이댔겠는가. 이런 사람들이 청와대에 가득하니 꼭대기부터 먼저 물이 새는 게 이상할 것이 없다.
그래도 이상하다. 과거 정권에서 이런 폭로는 거개가 임기 말에 터졌다. 지금 대통령은 취임 1년 8개월이다. 힘 있게 일할 기간은 지났지만 잔여 임기가 창창하다. 그런데 왜 둑 터진 듯 폭로가 잇따를까. 현 정권의 특징은 옳은 말을 잘한다는 것이다. 이 옳은 말이 이젠 정권의 발등을 찧는 도끼로 변했다. 현재 구치소·교도소에 수감 중인 전(前) 정권· 전전(前前) 정권 사람들에게 적용된 흔한 죄목(罪目)이 '직권 남용'과 '직무 유기'다. 본인들은 모르겠지만 국민은 현 정권 청와대 사람들의 행동을 '직권 남용'과 '직무 유기'라는 두 잣대로 재보고 있다.
옳은 말이 능란할수록 행동과의 거리는 더 커 보인다. 말과 행동과의 거리가 위선(僞善)이다. 사람들이 가장 미워하는 것이 위선이다. 대통령은 야당 시절 검찰을 '권력의 흉기(凶器)'로 대했다. 정치권력으로부터 '검찰의 해방(解放)'을 약속했다. 세상이 바뀐 오늘 검찰은 권력의 무엇이 됐는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국민을 다루는 방법을 안다고 착각한다. 국민도 그런 권력을 상대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척하기'다. 권력이 약속하면 믿는 '척한다'. 정권이 윽박지르면 복종하는 '척한다'. 경제가 좋다 하면 그 판단이 맞다는 '척한다'. 한·미 동맹이 튼튼하다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척한다'. 핵 없는 평화 시대가 열렸다 하면 바보처럼 벙긋 웃는 '척한다'.
40년 동안 하버드 대학에서 소련 역사를 가르쳤던 어느 역사가는 1917~1991년에 걸친 소련 역사를 이렇게 요약했다. "배급주는 '척하는' 권력과 일하는 '척했던' 국민과의 대결에서 권력이 졌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도는 작년 5월에서 12월 사이 30% 가까이 하락(下落)했다. '척하는' 데는 한국 국민도 도(道)가 튼 것이다.
정권에 부탁 하나 해야겠다. 무리한 부탁은 아니다. '무엇을 해달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강력한 야당이 있었더라면 박근혜 정권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럴 지경에 이르기 전에 야당이 제동(制動)을 걸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야당은 그런 구실을 못한다. 그것이 정권의 독(毒)인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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