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6.19 03:20
대통령은 현실을 벗어나 환상 세계에 빠졌는데
권력자 주변엔 '내시' 같은 참모들과 왕국의 臣民을 자처하는 홍위병들이 발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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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논설실장
북한의 합의 파기 도발에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이 더 충격받았을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정작 국민은 대통령의 그 말에 충격받았을 것 같다. 상식 있는 대다수 국민은 예상했을 결말이었다. 북한이 핵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아니라고 했다. 김정은이 "유연한 지도자"이고 핵을 "완전 포기"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장담이 허언(虛言)이었음이 2년 만에 드러났다. 허구와 환상으로 설계한 대북 올인 정책이 '예정된' 파국을 맞았다.
문 대통령의 현실 인식은 종종 '벌거벗은 임금님'에 비유되고 있다. 자기 환상에 빠진 나머지 사실과 다른 '가짜 뉴스'로 사람들을 아연케 하고 있다. OECD 꼴찌의 저성장에 빠졌는데 "상당한 고성장"이라 하고, 일자리 대란이 벌어졌는데 "고용 정책의 성과" 운운했다. 집값 상승세가 역대 최악인데 "부동산은 자신 있다"고 한다. 지난주에도 "코로나 이전엔 소득 불평등이 개선되고 있었다"고 했다. 이것 역시 통계적 사실과 달랐다.
대통령발(發) '가짜 뉴스'가 이어질 때마다 의아한 것이 있다. 참모들은 무얼 하고 있나. 청와대의 그 많은 참모 중 단 한 명이라도 제 역할을 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대통령의 경제 인식이 환상 세계를 폭주하는데 누구 하나 직언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관가엔 권력자 입맛에 맞춰 실상을 각색하는 영혼 없는 관료들뿐이다. 원전 산업을 죽이는 탈원전 폭주에도, 경제를 침체로 몰아가는 소득 주도 성장에도, 모래에 물 붓기식 세금 퍼붓기에도 한마디 제동 거는 관료를 본 적이 없다. 정권 내부의 분위기가 어떻길래 모두 '내시(內侍)'가 됐는가. 권력자의 오류를 바로잡는 교정 시스템이 작동하기는 하나.
대통령 측근들의 정신세계를 짐작하게 하는 사달이 벌어졌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문 대통령의 리더십을 비판하자 전직 참모들이 집단 반발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대통령 개인을 건드리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4명의 전직 수석·비서관이 발끈하면서 "대통령은 그런 분이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자신을 '주군 섬기는 가신'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이 정권 구성원들의 언행엔 왕조(王朝)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다. 조국 사태 때 한 여당 중진은 "형조판서(법무장관)가 입조했으니 의금부 도사(검찰총장)는 직분에 충실하라"는 글을 올렸다. 추미애 장관이 왔으니 윤석열은 꼼짝 말고 충성하란 뜻이었다. 추 장관도 '형조판서'로서 손색이 없었다. 검찰을 향해 "감히 명(命)을 거역했다"며 호통을 쳤다. 여권 인사와 청와대 대변인 사이에 문 대통령을 '태종·세종'에 빗대는 '용비어천가'가 오가기도 했다. 이들의 의식은 어느 시대를 살고 있을까.
민주주의를 왕정(王政)과 가르는 것이 법치다. 권력자 맘대로 국가 규범을 뒤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대북 전단을 둘러싼 법 해석이 돌연 뒤집혔다. 엊그제까지 북한에 전단을 띄우는 것이 법 위반이 아니라더니 돌연 불법이라고 한다. 법 위에 권력 코드가 있다. 이게 법치국가 맞나.
청와대가 울산 선거 개입 사건을 덮으려 하는 것도 정권이 법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의 30년 지기를 당선시키려 청와대가 총동원된 혐의가 드러났다. 검찰이 수사에 나서자 청와대는 압수 수색 영장을 세 차례나 거부하고 수사팀을 깡그리 교체했다. 그토록 국회 법사위원장 자리에 집착한 것도 사건을 덮으려는 목적일 것이다. 그야말로 야만적인 권력의 폭주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우리 민주주의는 남부럽지 않게 성숙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는가.
권력은 성역화되고 있다. 한 개그맨이 '문재인씨'라고 호칭했다가 친문 네티즌들의 집단 린치를 당한 끝에 사과문을 냈다. 조금이라도 대통령을 비판하면 문자 폭탄 테러가 벌어진다. 대통령에게 공격적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기레기'로 몰려 신상털이당한 기자가 수두룩하다. 어떤 25세 청년은 문 열린 대학 구내에 대통령 풍자 대자보를 붙였다는 죄로 재판을 받고 있다. 혐의는 '주거 침입죄'다. 정작 대학 측은 주거 침입도 아니고 처벌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검경은 억지 죄목을 갖다 붙여 기소를 강행했다. 이런 나라가 민주국가일 수 있을까.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법치에 금이 가고 경제가 가라앉고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 나라가 총체적으로 이상해지고 있는데 대통령은 "한 번도 경험 못 한 나라" 운운하며 환상을 말하고 있다.
권력은 '벌거벗은 임금' 꼴이 되고, 왕국의 충성스러운 '신민(臣民)'이 되겠다는 홍위병들이 나라 곳곳에서 발호하고 있다. 이 부조리극 같은 현실 앞에서 3년 내내 우리를 괴롭혔던 그 물음을 또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다. 이게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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