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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을사오적과 중국의 五賊

바람아님 2017. 10. 16. 12:01
(조선일보 2017.08.21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전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전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 

주일대사관에 근무할 때 '민단 오적'이란 말이 나온 적 있다.
민단에 대한 정부 보조금 삭감 문제로 분위기가 흉흉하던 차에 민단 관계자들이 정부 시책 협조를
촉구하던 대사관 관계자를 그렇게 부른 것이다. 70년대를 풍미한 김지하 시인의 재기 번뜩이는
풍자시 제목이 '오적'이다. 재벌, 국회의원,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을사오적'에 빗대 한국 사회의
암울한 단면을 그려낸 그의 시는 촌철살인 그 자체였다.
오적(五賊)은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다.
을사오적을 필두로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나쁜 놈'의 대명사다.
특히 을사오적은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어 나라 잃은 설움과 분노의 손가락질이 그들을 향해 집중된다.
(그럼에도 이완용 빼고는 나머지 네 명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드문 듯하다.)

오적이라는 말이 이웃 나라에 있을까 하여 찾아봤다. 필자가 조사해 본 바로는 일본에는 그런 말이 없다.
오적이라 부를 만한 존재가 없었던 것일까? 중국에는 있다. 중국의 오적은 뜻이 심오하다.
중국의 오적은 토적(土賊), 유적(流賊). 염적(塩賊), 요적(妖賊), 관적(官賊)을 말한다.
토적은 마적(馬賊), 산적(山賊), 수적(水賊), 해적(海賊)으로 약탈을 일삼는 도둑 떼다.
유적은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반(半)도적화한 부랑자 떼다.
염적은 생활필수품인 소금을 밀매하거나 매점매석하는 악덕 상인들이다.
요적은 '요상한' 이론으로 사람들을 홀리는 선동가들이다.
관적은 백성을 수탈하는 부패 관료들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개인적으로는 조선의 망국을 고작 사람 다섯의 탓으로 돌리는 세태가 성에 차지 않는다.
뭔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에 집착하는 느낌이랄까.
나라의 운명이 고관대작 몇 명의 손에 달려 있을 정도의 나라였다면, 그 허약했던 국력을 돌아보는 게 먼저가 아닌가 한다.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하는 저주에 빠질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
망국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을사오적으로는 역부족이다.
그 교훈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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