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4.08.18 신수진 사진심리학자)
자신이 속한 집단에 충실한 이가 무리 속에서 찾아낸 사명감으로
삶의 의미 담아 소중한 선물 남겨
말복과 입추가 함께 지나고 나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공기가 달콤하다.
절기(節氣)가 참으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인지, 절기를 아는 덕에 더 예민하게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바싹 다가온 가을 기운에 벌써부터 마음이 급해지는 사람들도 많다.
'이제 곧 가을이 깊어지면 한 해를 마무리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올 텐데, 뭐 달리 해놓은 것도 없이
왜 이리 시간만 빨리 가는 걸까?' 연휴에 만난 친구가 성급하게도 전형적인 가을 타기 푸념을
늘어놓는다. 요즘 한창 흥행몰이 중인 전쟁영화와 교황 방한에 관한 이야기 끝에 나온 말이다.
우리는 영웅이 빈곤한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는 영웅에 목말라 하고 누구는 영웅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영웅은 찾기도 되기도 어렵다.
어린 시절 영웅을 꿈꾸던 소년은 사라지고 어느새 인생의 계절을 감지할 수 있는 나이에 다다른 사람들에게 영웅은 그저
빛바랜 일기장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구하는 꿈을 꿀 권리가 있다.
사실 지금 내가 최선을 다하는 이 일이 오로지 나 하나 잘 살자고 하는 일이라면 신이 나서 뛰어다니며 고통을 감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무리 속에서 찾아낸 사명과 소명 의식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영웅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김녕만(1949~)은 신문기자와 사진 전문지 발행인으로 활동하면서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근면한 생활인이자 사진가로서의 시선을 지켜왔다.
그의 작업을 총망라한 사진집 '시대의 기억'(2013)에는 처음 사진을 시작하던 시절 고향에서
찍은 사진들에서부터 최근까지 40여 년의 세월 동안 한순간도 멈추지 않아 온 노력의
결과물들이 담겨 있는데, 그의 사진의 기본적인 특성은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이익과
가치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군청 홍보실에서 시작해서 신문사와 잡지사로, 그의 사진들은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역할에 얼마나 감사하면서 성실하게 달려왔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열성적으로 일을 하다 보니 세계적인 에이전시로부터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제안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그는 두리번거리지 않고 현재에만 몰두하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미련이 남지 않을 순 없겠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자리를
지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옳은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사진들은 시간과 함께 무르익어 자연스럽게 그가 지킨 자리와 시대의
기억과 역사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교육심리 전문가 마이클 거리안이 제시한 영웅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 중엔
명예로움과 진취성, 책임감과 친밀감 등 타인과의 관계나 집단적 가치를 전제로 하는
자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걸 갖추진 못했다 하더라도 아직 포기하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의 삶은 영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웅은 이루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녕만의 책에 실린 수많은 사진 중에 하필이면 이 사진이
지금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아마도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자신에게 주는 작은 선물의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영웅이 아니어도 괜찮다. 아직 꿈꾸고 있다면, 아직 길 위에 있다면, 가을이 오기 전에 지난여름 땀 흘린 당신을 위해
잔을 들어도 좋지 않겠나. 어제의 땀과 오늘의 위로가 내일의 당신을 특별하게 만들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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