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1409

[문정희 칼럼] 찬 바람 속에 떠오르는 슬픈 언니들

한겨레 2021. 12. 09. 18:06 [문정희 칼럼]나는 이렇듯 남성 중심의 유교 봉건 사회에서 슬프게 살다간 조선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한데 모아 (2000) 이라는 시선집을 펴낸 바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눈물을 머금고 이 시집을 그만 절판시켰다. 출판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시바삐 새로 보완하여 제대로 된 시선집을 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선 시집 제목을 '조선시대 여성 시선집' 정도로 해야 할 것을, 참고문헌들과 그 당시의 관습적 분류에 따라 이라 붙이고 말았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더라” 조선 시대 시인 이매창의 절창이 떠오르는 스산한 계절의 끝자락이다. 황진이와 함께 16세기 이 땅의 빼어난 시인 중 한 ..

[백영옥의 말과 글] 지옥에 대하여

조선일보 2021. 12. 04. 00:01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몇 날 몇 시에 죽음을 예고한 천사의 말이 실제 백주 대낮, 지옥의 사자들에 의해 시연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흥미로운 건 이 황당한 설정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죄를 지었으니 지옥에 가야 한다’는 인과론에 우리가 100퍼센트 공감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딱히 큰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지옥에 가는 사람이 생기면서부터다. 지은 죄가 없는데 지옥에 가야 한다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 음주 운전 차량에 남편을 잃었을 때, 어린 딸이 말기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우리는 생각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시간이 지나고 비극이 선명해지면 더 복잡한 질문이 우리를 파고든다. 대체 이런 일이 왜 ‘내게’ 생겼을까? 단언컨대 이 세상 ..

[백영옥의 말과 글] [228] 살아남은 자의 슬픔

조선일보 2021.11.27 00:00 아내를 잃은 유명 작가가 있었다. 그는 38년간 아내가 만든 주먹밥과 녹차를 먹으며 원고를 고쳤다. 주먹밥은 늘 시간에 쫓기던 그를 위한 아내의 배려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식욕마저 사라졌던 작가에게 허기가 찾아왔다. 오전 10시, 아내가 주먹밥과 녹차를 내주던 시간이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고, 찬장의 찻잔을 챙겼다. 하지만 아내가 어떻게 주먹밥을 만들었는지, 녹차를 우렸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멍하게 서 있던 그는 아침 식사를 건넨 후, 수고하라는 듯 늘 자신의 어깨를 두 번 두들기던 아내의 손을 떠올렸다. 햇살과 함께 스미던 따스한 손의 감촉이, 그 한결같은 응원의 목소리 말이다. https://news.v.daum.net/v/202111..

과거-현재가 소통하는 '사유의 방'[이즈미의 한국 블로그]

동아일보 2021. 11. 26. 03:03 소극장만 한 439m2(약 133평) 공간에 나지막한 타원형 무대가 있고 두 점의 조각상이 올려져 있다. 마치 무대 위에서 조용히 앉아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꽃미남 배우 같다. 11월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보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두 점이 나란히 전시된 새로운 상설전시실을 공개했다. 바로 ‘사유의 방’이다. 이 전시실은 지금까지 박물관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특별한 공간이다. 그 속의 두 반가사유상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고,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완벽한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유의 방’으로 이어지는 어둡고 고요한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나는 마치 일본 다실에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을 했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가 보니 생..

[백영옥의 말과 글] [227] 최악의 이별에 대하여

조선일보 2021. 11. 20. 00:00 그날, S는 페이스북에 들어갔다가 약혼녀 L의 프로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족 및 결혼/연애 상태가 ‘약혼’에서 ‘연애 중’으로 바뀐 것이다. 충격적인 건 ‘~와 연애 중’이라는 표시 옆에 S의 사진이 아닌, S와 가장 친한 친구의 사진이 있었다는 것이다. 충격에 빠진 그는 L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에게서 지난 3개월 동안 그의 절친과 사귀었고, 두 사람이 이제 그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https://news.v.daum.net/v/20211120000026607 [백영옥의 말과 글] [227] 최악의 이별에 대하여 [백영옥의 말과 글] [227] 최악의 이별에 대하여 그날, S는 페이스북에 들어갔다가 약혼녀 L의 프로필에서 눈을 ..

경복궁 옆 이건희 기증관, 광화문 박물관 단지 화룡점정 될까

연합뉴스 2021. 11. 14. 10:37 2000년대부터 서대문∼안국역에 박물관 잇따라 개관.."우연의 소산" "이건희 기증관은 동서고금 미술 아우르는 새로운 공간 돼야"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유족이 정부에 기증한 문화재와 미술품 2만3천여 점을 보존하고 전시할 이른바 '이건희 기증관' 위치가 종로구 송현동으로 낙점되면서 광화문 일대는 '박물관 단지'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됐다. 이건희 기증관이 들어설 자리는 경복궁 동쪽에 있으며,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에서 도보로 5분이면 닿는다. 기증관 부지 동쪽에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난 7월 옛 풍문여고 자리에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이 위치한다. https://news.v.daum.net/v/20211114103730505 경복궁 옆 이건희 기증관..

[백영옥의 말과 글] [226] '너 자신이 되라'는 충고

조선일보 2021. 11. 13. 00:00 Be yourself. ‘너 자신이 되라’는 이 문장은 지난 20년간 내가 소셜미디어의 프로필에서 가장 많이 본 문구다. 이 말을 사랑하는 사람은 정말 많아서, 나 역시 어느 시절 이 문장을 가슴에 새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을 ‘최악의 조언’이라고 충고한 사람이 있다. ‘오리지널스’의 저자 애덤 그랜트의 말에 따르면 진정성이란 양날의 검으로, 우리가 ‘오프라 윈프리’가 아닌 이상 이 말이 위험한 충고일 수 있다는 것이다. https://news.v.daum.net/v/20211113000026848 [백영옥의 말과 글] [226] '너 자신이 되라'는 충고 [백영옥의 말과 글] [226] '너 자신이 되라'는 충고 Be yourself. ‘너 자신이 되..

[자작나무 숲] 어떤 죽음을 원하십니까?

조선일보 2021. 11. 09. 03:03 결실과 소멸의 교차로인 늦가을, 죽음을 생각한다. ‘철학을 한다는 건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라는 명언의 주인공 몽테뉴는 살면서 늘 죽음에 관해 생각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낯설기만 한 죽음의 공포도 잠재워질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철학적 사유는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안 되었고, 아무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잘 죽는 사람은 정작 생각하지 않는 이들(가령 농부들)이었다. 그들은 가까운 이의 죽음을 두려워할지언정 자신의 죽음은 걱정하지 않았으며, 죽음 자체보다는 사후 처리 문제(신부의 기도, 관, 무덤의 십자가 등)를 염려했다. 16세기 프랑스 시골 농부를 통해 몽테뉴가 깨달은 바, 죽음의 공포를 물리치는 진짜 힘은 깊은 사색이나 용기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