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11.10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개미, 벌, 흰개미 등 이른바 사회성 곤충은 여왕을 중심으로 전체주의 사회를 이루고 산다.
이들 국가에서는 오로지 여왕벌 또는 여왕개미만 알을 낳고 일벌과 일개미는 평생 일만 하며 여왕의
자식들을 돌본다. 인류 사회에도 가끔 절대군주가 군림하며 상대적으로 많은 여성을 거느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주 홀로 자식을 낳고 온 백성은 그의 자식을 기르기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철저한 번식 분업이 같은 사회성 동물이지만 곤충 사회가 인간 사회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던 1988년 어느 날
미국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던 1988년 어느 날
나는 여왕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듯 보이는 개미 제국에도 왕권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침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직 온라인 검색 엔진이 개발되지 않았던 터라
그때까지 발표된 개미 관련 논문 수천 편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확인한 결과 일개미들도 심심찮게 알을 낳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학계에 보고했다.
일개미들은 원래부터 불임이 아니라 여왕이 분비하는 페로몬 때문에 생식 기능이 멈춰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변방의 일개미들은 여왕 페로몬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체 기능이 회복되어
알을 낳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일개미들은 교미를 하지 않은 채 미수정란을 낳기 때문에 그저 수개미만 생산할 뿐이다.
이렇게 다분히 수동적이고 제한적인 줄 알았던 곤충 사회의 모반이 상당히 의도적이고 조직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커런트 바이올로지' 최신호에 따르면 미국 말벌(yellow jacket) 사회에서는 일벌들이 종종 여왕을 살해하고 자기 들이
낳은 수벌들과 교미한 여왕을 옹립한다.
흥미롭게도 유전적으로 다양한 일벌들이 낳은 수벌들과 고루 교미한 여왕은 살해당할 확률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옛날 왕정 시대에 왕족이나 신하들이 왕을 살해하는 것과 흡사한 현상이 곤충 사회에서 벌어지는 것도 흥미롭지만,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계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이 말벌 사회에서도 통한다니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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